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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문헌 목록 〉14. 14世 〉26. <부정공>통훈대부행운산군수공휘하형묘지명(通訓大夫行雲山郡守公諱夏亨墓誌銘)
1. 문헌 목록 〉14. 14世 〉28. <부정공>학생공휘진구묘갈명(學生公諱晋耈墓碣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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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부정공>첨사증가선대부공조참판겸오위도총부부총관공휘치형묘지(僉使贈嘉善大夫工曹參判兼五衛都摠府副摠管公諱致亨墓誌)
僉使贈嘉善大夫工曹參判兼五衛都摠府副摠管公諱致亨墓誌 嗚呼維昇州治西松光面九表谷背壬之原即 贈侍郎趙公諱致亨衣履之藏也公以大將軍諱璋爲上祖肇自開京中葉而始顯有曰密直副使諱洪珪 贈版圖判書文科諱佺追封府院君諱元吉文科門下侍中與鄭圃隱偰芸亭廢辛昌策勳封玉川君諡忠獻以農隱爲號而時有五隱之稱諱瑜司馬文科副正當時通喪之禮不行獨三年廬墓及社屋八不朝峴全節本朝徵以官不就 世宗旌其孝而特書前朝官並褒不二之節也生諱崇文武科兵使號竹村其在北道禦野人有功 景泰丙子謀復 上王父子相對涕泣叅六臣禍同日並命 旌閭 贈判書腏享 莊陵壇謙川祠諡節愍又配 肅慕殿庭子諱哲山號龜川克承父志一軆成仁 旌閭 贈敎官孫諱瓊坐謫蒙宥自號杜門以終僅傳門戶碩果不食之報於此可見諱昌門彰信校尉高祖諱愷以丙子死事人子孫錄用除禮賓寺參奉曾祖諱宗元奉事龍蛇赴高忠烈義旅大父諱蓂贈軍資監正考諱允纘 贈參議妣淑夫人前後皆光山金氏而龍弼爲外祖也公字泰而玉川人 崇禎壬午九月十日生凡六昆季序居第五 肅宗丙辰武科行兵馬僉節制使甲戌三月十四日考終于本第享年五十三以庶子世望追榮 贈嘉善大夫工曹參判配貞夫人咸豊李氏參議思新女卒二月三十日墓梧里峙坐乾之兆繼配貞夫人洪川宋氏考貞吉而辛卯四月六日生己丑三月六日卒祔公塋下亥坐並无育以四兄濟亨三子世行爲嗣亦武科僉使世望壽階資憲東臣東昌光山金元輅仁川李光岳慶州金嵂嫡房子若婿也東春東良東七貳房子也顯一金維説東臣男女應夏應春顯三顯五側出顯龜朴壽淵東昌男女基孝基信顯龜出而基孝爲顯一后金永復金邦岳皆所後姊妹也餘不盡錄嗚呼今距公之世己二百餘年矣其志行終始有不能詳然後孫之相承代有衣冠人福祿延綿至于今未艾可驗於平日家庭忠孝之擩染友恭之篤厚有以致也但世代相遠實有杞宋無徵之歎姱行徽躅湮沒不稱是可恨焉略書公世德履歷將以瘞於壙南爲異日攷後之人尚有以徵信哉謁文者公八世孫洪燮也 傍孫 俊燮 撰 첨사증가선대부공조참판겸오위도총부부총관공휘치형묘지(僉使贈嘉善大夫工曹參判兼五衛都摠府副摠管公諱致亨墓誌) 슬프다! 생각하니 승주군 송광면 구표곡(九表谷) 임좌 언덕은 바로 증시랑(贈侍郎) 조공 휘 치형(致亨)의 가성(佳城)이다. 절민공 휘 숭문(崇文)의 후손으로 증조 휘 종원(宗元)은 봉사(奉事)로 임진왜란에 의병을 이끌고 고제봉(高霽峯)의 군막에 참여했고, 조휘 명(蓂)은 증 군자감정(贈軍資監正)이요, 고휘 윤찬(允纘)은 증참의(贈參議)이며 비는 숙부인으로 전후가 다 광산김씨인데 용필(龍弼)이 그 외조이다. 공의 자는 태이(泰而)요, 옥천인(玉川人)인데 숭정 임오년 九월 十일에 六형제 중 五남으로 출생하여 숙종 병진년(一六七六)에 무과에 올라 병마첨절제사(兵馬僉節制使)를 행직하고 갑술년 三월 十四일에 향년 五十三세로 정침에서 별세하였으며, 서자 세망(世望)의 영귀로써 가선대부 공조참판의 증직을 받았다. 배 정부인 함풍이씨(咸豊李氏)는 참의 사신(思新)의 따님으로 二월 三十일에 별세하여 오리치(梧里峙)건좌 언덕에 안장하였고, 계배 정부인 홍천송씨(洪川宋氏)는 정길(貞吉)의 따님으로 신묘년 四월 六일에 출생하여 기축년 三월 六일에 별세하여 공의 묘소 아래 해좌에 부장하였다. 다같이 소생이 없으므로 四형 제형(濟亨)의 三자 세행(世行)으로 후사를 정하였는데 무과(武科)에 급제, 첨사(僉使)를 지냈고 세망(世望)은 수직 자헌대부이다. 동신(東臣)·동창(東昌)·광산 김원로(金元輅)·인천 이광악(李光岳)·경주 김율(金嵂)은 적방의 아들과 사위이고 동춘(東春)·동량(東良)·동칠(東七)은 二방의 아들이며 현일(顯一)·김유설(金維説)은 동신(東臣)의 남녀이고 응하(應夏)·응춘(應春)·현삼(顯三)·현오(顯五)는 측실 소생이요, 현귀(顯龜)와 박수연(朴壽淵)은 동창(東昌)의 남녀이며, 기효(基孝)·기신(基信)은 현귀(顯龜) 소생으로 기효는 현일(顯一)의 후사가 되었고, 김영복(金永復)·김방악(金邦岳)은 호수자매(所後姊妹)이며 나머지는 다 기록치 못한다. 슬프다. 이제 공이 별세하신 지 이미 二백여 년이라. 그 지조와 행의의 시종이 자세치 못한 데가 있으나 공의 후손이 서로 세덕을 이어 대대로 학행이 끊어지지 않고 복록이 지금까지 연면(連綿)하여 그치지 아니하며 항상 가정에서 충의와 효행을 듣고 볼 수 있고 우애와 공경을 더욱 독실하고 두텁게 하니 공의 이룬 덕을 여기에서 가히 증험할 수 있겠다. 다만 세대가 서로 멀어 진실로 사적을 증거할 수 없는 안타까움이 있을 뿐만 아니라 아름다운 말과 착한 행실을 찾아 볼 수 없는 것이 더욱 한스럽도다. 대략 공의 세덕과 이력을 기록하여 장차 이를 무덤 남쪽에 묻고 후일을 증거하니 후인은 이로써 증신(徵信)할지어다. 지문을 청한 자는 공의 八세손 홍섭(洪燮)이다. 傍孫 俊燮 삼가 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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